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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영웅’의 그늘을 걷어낸 인간 안중근의 가장 치열했던 일주일

하얼빈

김훈님 저작 중에 두 번째로 접한 영웅이야기 입니다. ‘칼의 노래’도 역사로만 접했던 이순신을 인간 이순신으로 섬세하게 표현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 책에서도 인간 안중근을 가난, 청춘, 그리고 살아 숨쉬는 육체로 담담히 풀어놓았습니다. 절제된 표현과 대화로 이런 전달력을 보여주는 작가는 손에 꼽습니다.


안중근 아내 김아려

안중근은 밖에서 도모하는 일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김아려는 시댁 사내들의 말을
귀동냥해서 남편의 일을 짐작했다.
김아려는 혼인한 지 십 년이 지났음에도
나그네 같은 남편을 어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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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한 인물을 조망할 때 대상만 바라보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럴때마다 주변 인물이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특히, 가족이라면 어떤 심정일지 몹시 알고 싶어집니다. 안중근 아내 김아려에 대해선 많은 것이 알려지진 않은 듯 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자주 만나지 못해 서로 감정적인 교류가 어려웠을 것을 짐작합니다. 그 시대가 그랬을 수 있습니다만, 독립운동가 가족, 특히 아내라는 건 너무나 혹독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사진을 남기는 마음

안중근은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것이 나로구나……
내가 살아서 이토를 쏘는구나……
이발을 마치고 안중근은
우덕순을 데리고 사진관으로 갔다.
— 사진을 찍자.
— 돈이 모자랄 텐데……
— 겨우 된다.
— 지금 찍으면 찾을 수가 있겠나!
— 없다. 그래도 찍어두면 남는다. 새로 산 옷을 입고 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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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투사들이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남기는 자신의 흔적이었을 겁니다. 가난 속에 거사를 치르는 비용도 빠듯한 가운데 사람이라면 갖는 복잡한 감정이 이 간결한 대사에 잘 담겨있습니다. 감정을 흩뿌리지 않는 이런 담담한 대사가 이야기의 농도를 더해줍니다.


하얼빈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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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무게를 둔 것은 작가의 말에 나와 있듯이 ‘안중근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입니다. 그래서인지 가장 중요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장면은 너무도 간결합니다. 그 뒤에 나올 투옥부터 시작되는 고초 속 안중근이 더 중요했을 겁니다.



우리에게 각인된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에게 총을 쏜 장면일 겁니다. 장엄한 투사로 그려진 그에게도 삶이 있고, 가족이 있으며, 그럼에도 이루려던 뜻이 어떤 고뇌가 있었을지 깊은 울림으로 전달됩니다. 이것이 작가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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