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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중세의 '화려한 반역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皇帝フリードリッヒ二世の生涯 上

塩野七生 | 2013


국내에서는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일본 역사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마지막 작품입니다. 원서 기준으로는 이미 12년이나 지난 작품이지만, 국내 번역은 4년 정도 밖에 안 됐습니다. 역사학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엄청난 자료 조사와 필력으로 시오노 나나미 작품을 싫어하긴 참 어렵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그 세 가지를,
1212년 3월 중반부터 같은 해 12월 중반까지 불과 9개월 동안에 모두 이루었다.
수많은 방해에 직면했지만 열여덟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다 이루어낸 것이다.

2장 열일곱에 일어서다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습니다. 로마 이후 후기 제국 어쩌고겠지 하는 막연함만 있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는 유럽 중세로 분류되는 시기이기도 했고, 십자군 전쟁, 백년 전쟁, 장미 전쟁 정도만 약간 들었을 뿐입니다. 당시가 신성로마제국과 무슨 관계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시오노 나나미가 관심있게 본 인물이니 무언가 흥미롭겠다는 기대감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헌데 시작하자마자 모든 상황이 불리하여 그냥 사라져버릴 운명이 당연한 아이 처지가 가련하기까지 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는 역사에서는 이런 경우 이름만 남고 사라져도 다행이다 싶은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한국 나이로 바꿔도 스무살이 되기 전에 극복하고 일어섭니다.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카이사르를 어느 시대에 태어났어도 정치적인 인간이었고, 지도자가 되었을 인물이라는 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프리드리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천재는 태어난다는 말은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십자군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가 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본인의 성지 입성은
중근동 그리스도교도 전원이 열광하는 가운데 실현되었다.

4장 무혈 십자군
성지 입성

우리 역사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에 ‘세치 혀’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도라고 생각되는 것 외에는 다 무시하는 처사로 낮춰부르는 말 중에 하나입니다. 이 당시에도 예루살렘을 놓고 적대적 관계인 이슬람과의 대치 상황은 피를 흘려야만 용인되는 것이었나 봅니다. 손자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을 범인들은 그 보는 눈이 닫혀 있으니 볼수가 없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무릇 지도자라는 자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게 아니라 보기 싫은 것도 볼 수 있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가 작성한 ‘멜피 헌장’은 그가 직접 쓴 서문에서도 밝혔듯
자신이 통치하는 왕국,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포함한 ‘시칠리아 왕국’을
법치국가로 확립하려면 어떤 정치 체제여야 하는지,
또 그 정치 체제는 어떤 법률로 다스려져야 하는지를 기록한 것이다.

5장 이제는 완전하게, 법치국가로
멜피 헌장

역사에서 국가라는 틀이 형성되었다고 볼 때 중요한 근거 중에 하나가 법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보다 일본이 국가 형성을 먼저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주에 하나도 법전을 듭니다. 그런 면에서 유럽은 고대로 보는 로마 때 이미 법전을 만듭니다. 프리드리히는 멜피 헌장을 통해 이 나라의 법과 제도를 완전히 정비합니다. 소위 말하는 ‘법치국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중세를 넘어 다음 시대로 건너가려고 한 인물이었던 겁니다.



역사를 보면 한 시대를 저물게하고 다음 시대를 여는 사건이나 인물이 나오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진 힘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가교 역할을 한 이런 인물이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뛰쳐나온 걸 보면 경외심까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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